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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4.19 혁명, 소년 김주열, 되살아온 아이

by 나혼산밍키 2023.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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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김주열 당시 나이 17살이었습니다. 김주열의 행적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1960년 3월 15일 김주열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어머니는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짐을 꾸렸습니다. 김주열의 어머니 권찬주여사는 주열이를 찾기 전까지는 집에 돌아오지 않겠다며 아픈 남편에게 몸조리 잘하고 계시라고 당부하고 마산으로 출발합니다. 골목골목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전부 붙잡고 물어봅니다. 주열이의 사진을 보여주며 스포츠머리에 검은 바지를 입었으니 보면 꼭 연락을 달라고 부탁합니다. 같은 시각 부산일보 마산지국에서는 주열이의 행방을 찾는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허종 기자님이었습니다. 단순 실종 사건이 아니라고 확신했던 허기자는 신문에 실종기사를 내고 정보원들을 동원했습니다. 사진기사는 아니었지만 비상용으로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던 습관이 있었습니다. 1960년대는 마음껏 취재할 수 없었던 당시의 분위기 때문에 양복 안주머니에 카메라를 숨기고 취재를 다녔습니다. 어느덧 실종 27일째 부둣가에 몇 명이 모여있었습니다. 허기자도 달려가서 바닷속을 들여다봤습니다. 바로 그 순간 주열이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바로 카메라를 꺼내 들고 재빨리 셔터를 눌렀습니다.

그날 허기자가 찍은 사진이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꿨습니다. 주열이의 얼굴에 박힌 물체는 프로펠러였습니다. 자세히 보니 프로펠러 형태의 미제포탄이 주열이의 얼굴을 관통하고 있었습니다. 포탄의 이름은 TEAR GAS로 일명 최루탄이었습니다. 최루탄은 주로 시위 진압에 사용하는 화학무기로 눈이나 피부 호흡기 등에 들어가면 눈물과 콧물이 분비되며 접촉 부위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위해성 경찰장비 사용기 중 규정 제12조를 보면 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우는 30도 이상의 발사각을 유지하고 허공에 쏘게 되어있습니다. 근데 주열이의 눈에 박힌 최루탄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사람에게 대놓고 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최루탄의 출처를 범인은 생각보다 빨리 잡혔습니다. 마산 경찰서 경비 주임으로 이름은 박종표 경위였습니다. 경비주임의 주된 임무는 집회나 시위현장을 통제하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박경위는 주열이에게 최루탄을 쏜 것일까? 3월 15일은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는 날이었습니다. 당시 대통령은 이승만으로 2번의 개헌으로 12년간 장기집권을 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경찰 간부들을 불러 모은 내무부장관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승만박사와 이기붕 선생이 당선되도록 지시했습니다. 85%의 목표 득표율을 정해주고 미달성 시 자리를 뺏는다며 사표까지 미리 받아갔습니다. 선거일이 다가오자 구체적인 비밀지령이 내려옵니다. 이름하여 4할 사전투표로 40%가 불참이나 기권으로 투표를 안 할 거라고 가정하고 미리 투표함에 표를 넣어놓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유권자 수보다 표가 더 많이 나와서 도로 빼서 불태우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당선이 안된다면 투표함 운반 도중 표를 바꿔치기하라고 전달했습니다. 바꿔치기할 때 야당 참관인이 못 나오게 막고 부득이할 경우 유혈극까지 실행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투표가 시작하고 사전투표를 눈치챈 야당 측 참관인이 눈치를 채고 투표함을 열어보라고 하며 몸싸움이 일어나고 투표함이 쓰러졌습니다. 여당 쪽에 투표가 된 4할의 표가 들어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발각되기 시작하고 오전 10시 30분 야당은 선거중단을 선언하는 벽보를 붙였습니다. 이번선거는 불법무법선거다 인정할 수 없다며 현수막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시민들도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하고 주열이 형제도 시위에 동참하게 됩니다. 시위에는 유독 중, 고등학생들 많이 참가했습니다. 어느새 날이 저물고 박경위는 기동대원들과 시청 앞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시위대가 올 줄 알고 이중삼중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최루탄과 발사총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시위대의 전진에 갑자기 소방차 한대가 시위대를 향해 돌진하고 시위대는 소방차를 피해기 위해 옆으로 이동합니다. 그 순간 소방차는 전신주를 들이받고 마산시내는 정전이 됐습니다. 일렬로 서있던 차들이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켜고 차 뒤에 숨어있던 경찰들이 총을 들고 시민들을 향해 최루탄을 발사하기 시작합니다. 형은 주열이의 손을 놓쳐버리고 그 이후 주열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 마산경찰서 순경 하나가 박경위에게 들어오며 말합니다. 눈에 포탄이 박힌 시체가 있습니다. 바로 현장으로 갔더니 어둠 속에 누워있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박경위는 상관에게 보고하지만 알아서 적당히 처리하고 명령하고 주열이의 시신을 차에 싣고 주열의 몸에 돌을 매달고 바다로 던졌습니다.

하지만 27일 만에 주열이의 시신이 떠오르게 되고 부패도 거의 되지 않고 우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허종기자의 사진이 신문에 실려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4.19 혁명이 시작됐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주의혁명이었습니다. 이승만은 대통령 사임을 선언하고 하와이로 망명을 갔습니다. 주열이는 고향에 묻히게 되고 4월의 영혼 고 김주열이라고 적힌 묘비명이 옆에 세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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