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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12.12 군사 반란 요약

by 나혼산밍키 2023.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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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에서 수십 발의 총성의 울립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습니다. 박정희의 최측근이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그리고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살해한 것입니다. 그렇게 18년 간의 박정희 군사 정권이 끝나자 대한민국에는 이러한 기대가 생깁니다. 이렇게 민주와 희망에 부풀었던 기간을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사망부터 1980년 5월까지 지속되었던 '서울의 봄'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끝내 봄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등장했던 한 명의 인물 그리고 그가 이끄는 강력한 집단 때문이었습니다.

 

12.12 군사반란

바로 1979년 12월 12일 투스타 장군 전두환이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이끌고 불법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바로 12.12 군사 반란입니다. 이로 인해 전두환은 대한민국 국군 전체를 장악했고 다음 해 자신이 대한민국 1호가 되어 또 다른 군사독재 시대를 열게 됩니다. 지금부터 전두환의 집권을 가능케 한 1979년 12월 12일 그날 밤 9시간 동안에 긴박했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김재규의 대통령 암살로 대한민국 권력 최상층에는 격변이 일어났습니다. 일인자인 대통령 그리고 이인자인 대통령 경호실장이 동시에 사망한 것입니다. 그다음 서열로 각각 민간정보기관 군 정보기관의 수장인 중앙정보부장과 보안 사령관이 있었는데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그 자신이 암살혐의로 체포되었으며 남은 건 보안 사령관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보안 사령관이 바로 전두환이었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권력 최상층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대통령 암살 후 급하게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제주도 제외 전국에는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 그리고 암살 사건 수사를 위해 계엄령 아래에서 합동 수사본부 통칭 '합수부'가 꾸려졌는데 합수부가 이끄는 본부장의 자리는 검찰, 경찰 등 모든 정보 수사 기관을 통제할 수 있는 엄청난 권력직 중 하나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권력의 공백으로 인해 그 자리에 앉을 사람이 전두환 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합수부장이 된 전두환, 전두환은자신이 대한민국 국군을 장악하겠다는 야심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바로 그가 이끄는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필두로 해서 말입니다. 하나회는 전두한, 노태우 등 육군사관학교 11, 12기 생들을 주축으로 하는 장교 모임으로 군 내 각계각층에 무려 200 ~ 300여 명의 회원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이런 사조직을 갖는다는 건 당연히 불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뒤를 봐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습니다. 하나회는 박정희와 같은 영남 출신이 주축이었고 이들을 자신의 친위대로 육성하고자 후원을 해온 것입니다. 이런 하나회는 굉장한 엘리트 의식을 갖고 있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회 주축인 육사 11기생부터 최초로 육사 4년제 정규 교육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전 기수는 6개월간의 교육만을 수료했습니다. 따라서 하나회는 자신만이 진정한 군인이라 생각하고 고위 장성들 구성된 이전 기수선배들과 굉장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합수 부장이 된 전두환이었으니 당연히 하나회 중심으로 군대를 장악할 강력 추진력이 생긴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선배 장교들은 일을 못 마땅해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당시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정승화였습니다. 계엄령하에서 정승화는 대통령, 국방장관에 다음 가는 권력을 갖고 있었는데 그는 육사 11기 이전 장성으로 하나회와는 갈등 관계에 속해있었습니다. 그러한 정승화는 전두환에게 위협을 느꼈고 먼저 선수를 쳐서 전두환을 보안 사령관직에서 경질시키기 위해 국방장관 노재현과 한 차례 의논했습니다. 하지만 그 소식은 전두환의 귀에 들어가고 맙니다. 각계각층에 포진한 하나회 인맥을 통해서 말입니다.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무력화

이에 크게 위협을 느낀 전두환은 특단에 결심을 하게 됩니다. 바로 직속상관인 정승화를 체포하여 무력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체포 먼저 하고 합수부장의 능력으로 어떻게든 죄를 덮어씌울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야 전두환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으니까요. 그간 내세운 체포 명부는 "정승화 육군 참모 총장은 대통령 암살 당시 그 장소 부근에 있었다. 이는 정승화가 사실 김재규와 대통령 암살을 내통했다는 증거이자 심지어는 김재규에게 돈까지 받았어" 하지만 이는 꾸며 내기에 불과했습니다. 정승화가 대통령 암살 장소 부근에 있던 것은 맞았지만 김재규와 내통한 사실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두환은 일단 정승화를 체포한 뒤 대통령에게 사후 보고하여 체포를 허가받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2월 10일 전후 하나회 소속 수도권 주요 지휘관과 접촉해 정승화 체포 작전을 세웁니다. 작전의 이름은 '생일집잔치'였다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직속상관을 체포하는 명백한 반란 보였지만 결국 12월 12일 반란을 실행하기로 결의합니다. 그렇게 작전 개시일 오후가 되었습니다. 시작에 앞서 전두환은 먼저 밑작업부터 시작했습니다. 일단 아무리 하나회가 많았어도 여전히 친 정승화 계열 장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반란을 일으킨 합수부 측은 주도면밀하게 그날 연희동 요정에서 연회를 열어 그러한 장성들을 초대해 놓았습니다. 그중에는 수경사(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특전사령관 정병주가 있었습니다. 수경사와 특전사는 수도 유사시 동원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부대로 전두환에게 맞서게 된다면 매우 위험했습니다. 따라서 그 사령관을 초대해 붙잡아 놓은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오후 7시 10분이 되자 본 작전이 시작됩니다. 정승화 체포를 위해 합수부 측 헌병 65명이 출동해 정승화가 있는 한남동 육참총장 공관으로 난입한 것입니다. 그들은 공관 경비원을 개머리판으로 구태해 제합했고 정승화에게 들이닥칩니다. 그리고 대통령의 체포 허가가 떨어졌다며 정승화에게 체포에 응할 것을 요구합니다. 물론 허가는 받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에 정승화는 국방장관에게 확인전화를 해야겠다고 했지만 전화하려는 그 즉시 합수부군은 정승화 측 호위병에게 총을 난사했고 총격전 끝에 정승화를 제압하여 체포했습니다. 결국 정승화는 합수부 차량에 강제로 태워져 서빙고 대공분실로 끌려가게 됩니다. 총소리를 듣고 허겁지겁 공관을 지키는 해병대가 출동했지만 이미 정승화는 연행된 뒤였습니다. 같은 시각, 전두환은 허가를 받기 위해 직접 최규하 대통령의 공관으로 향했습니다. 참고로 최규하는 12월 6일 대통령으로 선출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전두환은 정승화 체포 허가를 요청합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큰 사건에 연루되길 꺼려했기 때문에 금방 허가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최규하는 중대한 사항이므로 국방장관 노재현과 논의한 뒤 검토하겠다며 체포허가를 거부합니다. 상급자를 체포해 반란군이 된 전두환은 백방으로 국방장관을 찾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국방부장관은 총격소리에 놀라 도망을 간 상태라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곧 정승화 체포소식이 연회에 초대되었던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이들은 크게 놀라며 급하게 자리를 떠나 각자의 본부로 가서 전두환 측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엄청난 위기를 느낀 합수부는 전두환은 오후 9시 30분 최규하에게 재차 체포 허가를 요구하지만 거부당합니다.

육군본부와 국방부 장악

이에 전두환은 무력을 동원하여 대한민국 군대를 장악해 자신의 불법행위를 덮어 버리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각계각층에는 수많은 하나회 장교가 포진해 있었습니다. 수경사는 행정병만 남기고 사실상 하나회에 가담했고 특전사는 9 공수여단을 제외한 나머지 1, 3, 5 공수여단이 가담해 있었습니다. 전두환은 먼저 특전사 1 공수여단을 출동시켜 정승화계열 즉 육군지휘부 장성들의 본부인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장악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런데 이런 야심 찬 첫 출동은, 합수부 측에 재앙이 되어 버립니다. 1 공수여단은 전두환의 명령으로 출동했지만 1공수여단의 적법한 지휘권은 육군지휘부(정승화 측 장성들)에게 있었습니다. 따라서 1공수여단은 본대로 회군하게 됩니다. 오히려, 이 출동은 육군지휘부 측을 크게 자극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26사단, 수도기계화사단사단에 연락하게 됩니다. 이들은 수도권 비상사태 시 투입되는 '충정부대'들로 이 두 개 사단이 서울로 진입한다면 합수부는 곧바로 진압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명령을 안 듣고 출동하지 않았습니다. 다름 아닌 합수부의 방해공작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연락망을 장악하고 있던 전두환은 이미 육군지휘부의 무전을 도청하고 이를 막았던 것입니다. 9 공수여단장은 윤흥기 소장으로 육사가 아닌 갑종출신이라 하나회에 속하지 않았기에 육군지휘부는 9 공수에게 출동을 명령합니다. 시각은 13일 자정으로 넘어간 0시 5분이었습니다. 당시 합수부는 병력이 도착하지 않아 군사가 없었고 9 공수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에 합수부는 '공격 중지 협정' 소위 '신사협정'을 맺자고 제안합니다. 합수부는 지킬 생각 없는 제안을 하고 진압군 측은 미끼를 물어버립니다. 당시는 1970년대로 북한의 위협은 강했기 때문에 한국군이 분열된 걸 알게 되면 북한이 언제 남침할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9 공수는 출동 15분 만인 0시 20분 부천 IC에서 회군하고 말았습니다.

왼쪽 김오랑 사령 특전사 비서실장

특전사령부, 중앙청 장악

급한 불은 끈 전두환은 3 공수여단을 출동시켜 거여동 특전사령부를 장악하라고 명령합니다. 13일 자정 특전사령부에 도착한 3 공수단은 그곳에 진입해 총기를 난사했고 정병주는 왼팔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정병주를 지키던 특전사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은 합수부 측 병력에 살해당했습니다. 참고로 김오랑은 그날 특전사령부 건물 안에서 유일하게 저항한 특전사였습니다. 특전사가 장악되고 육군, 국방부를 장악하기 위해 1 공수여단에게 재차 출격명령을 내립니다. 1 공수여단장 박희도는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병력을 출동시켰습니다. 오전 1시 35분 800여 명이 행주대교를 통해 용산으로 집입했습니다. 육군지휘부는 국방부 건물 옥상에 배치된 방공용 발칸포까지 쏘며 저항했지만 결국 점령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사라졌던 노재현 국방장관이 바로 국방부 건물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필 한미연합사에 도망가있다가 방금 막 국방부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습니다. 합수부 군은 노재현을 연행해 갑니다. 당시 구사단장의 핵심 인물인 노태우는 병력을 빼서 새벽 2시 20분경 서울의 중앙청을 점령하고 육군 지휘부의 기세를 꺾어버립니다.

수경사 장악

남은 것은 수경사뿐이었습니다. 장태완에게는 행정병 1개 중대 밖에 남아있지 않았고 탱크 4대, 대전차포, 100여 명의 병력으로 반란군에게 마지막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하지만 결국 이 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새벽 3시 40분 수경사는 점령당하고 합수부 측의 완승으로 상황이 끝나버립니다.

신군부 등장

최규하는 노재현장관과 만나 새벽 4시 50분경 정승화 체포를 허가했지만 이미 군사반란은 성공한 후였습니다. 최규하는 허가서명을 할 때 서명당시 시각을 써 놓음으로써 이건이 체포 후 '사후 재가'임을 밝혔습니다. 전두환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내란방조죄를 적용시켜 징역 10년을 선고하고 4성 장군에서 이등병으로 강등시켜 불명예제대를 시켰으며 정병주와 장태화는 소장 신분으로 강제 예편(전역)당했습니다. 이제 전두환 그리고 하나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군부인 신군부가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그는 1980년 4월 보안 사령관직에 더해 중앙정보부장 수장까지 겸임하게 되어 최고 실세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양대 정보기구를 장악해 버린 전두환에게 반발했고 나아가 신군부 반발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서울의 봄 기간 중 5월 15일 서울에서 무려 15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신군부는 쿠데타를 일으키게 됩니다. 1980년 5월 17일 5.17 비상계엄확대조치를 내리 고전국 31개 대학에 계엄군이 배치되어 국민들의 모든 정치활동, 시위, 정치적 발언이 금지되었습니다. 국회는 계엄령을 해제하려 했지만 신군부는 탱크를 동원해 국회를 봉쇄해 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렇게 신군부는 무력으로 대한민국 권력을 장악했고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은 사임을 하게 됩니다. 전두환은 체육관 선거를 통해 8월 27일 대통령으로 선출됐고 신군부의 군사독재가 도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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